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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요약]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우리가 보는 세계는 거대한 환영이자 맹목적인 의지의 반영이다 본문

■ 35년의 무명 생활이 증명한 고독한 진실의 무게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철학적 정수를 담은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세상에 내놓았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가 기대했던 지적 반향은 없었다. 1819년 초판 발행 이후 그에게 허락된 것은 35년에 걸친 철저한 무관심과 냉대뿐이었다. 당대 독일 철학계는 헤겔이라는 ‘정신적 괴물’이 퍼뜨린 궤변과 협잡에 마비되어 있었으며, 대학의 철학 교수들은 진리 탐구보다 생계와 권력의 비위를 맞추는 데 골몰했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학계의 세태를 “칠흑 같은 겨울밤”이라 명명하며 경멸했다. 그는 진리를 “자신을 갈망하지 않는 자에게 치근대는 창녀가 아니라, 모든 것을 바쳐도 호의를 확신할 수 없는 쌀쌀맞은 미녀”에 비유하며 고독한 투쟁을 이어갔다.
그가 일흔둘이 되어서야 이 책의 제3판이 나오고 대중의 열광이 시작된 것은 지독한 역설이자 필연이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사상이 ‘동시대인’이 아닌 ‘인류’를 향해 쓰였음을 확신했다. 그는 제3판 서문에서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의 구절을 인용하며 고독했던 세월을 회고한다.

이 문장은 당대의 유행에 영합하지 않고 오직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진리만을 추구했던 천재의 단호한 선언이다. 35년간의 냉대는 그의 사상이 지닌 파괴적 진실을 감당하기에 당대의 지적 수준이 미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훈장이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실패로 보였던 긴 세월이 결국 진리의 영속성을 증명하는 과정이었음을 깨닫는다. 현상 너머의 본질을 통찰하는 일은 이토록 무거운 고독을 전제로 한다.
■ 세계의 겉모습: 인식하는 주관에 의해 창조되는 표상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는 인식하는 주관과 관계함으로써만 존재하는 표상이다. 이 개념은 데카르트(1596~1650)가 출발점으로 삼은 회의적 고찰에 이미 존재했으며, 이후 버클리가 이를 최초로 단호하게 주장했다. 이는 기원전 1500년경에 활동한 비아사가 주창한 베단타 철학의 근본 명제이기도 하며, 인도의 현자들은 이를 일찍이 인식했다. 영국의 동양학자 윌리엄 존스(1746~1794)는 자신의 논문에서 베단타 학파가 물질이 인간의 지각과 무관한 어떠한 본질도 갖지 않는다고 강력히 주장했음을 증언한다.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불가분의 두 가지 측면, 즉 객관과 주관을 지닌다. 한 측면인 객관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형식을 가지며, 이로 인해 다수성이 생겨난다. 반면 다른 측면인 주관은 인식하면서도 인식되지 않는 세계의 담당자로서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표상하는 존재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사라져 버리면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저자는 세계가 철저히 주관의 인식 조건에 종속되어 있음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선언한다.

이처럼 근거율에 종속된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덧없고 실체가 없는 특징을 지닌다. 기원전 540년부터 480년경에 생존한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영원한 흐름을 탄식했고, 플라톤 역시 사물이 항시 생성되지만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깎아내렸다. 고대 인도의 지혜는 이를 인간의 눈을 가리는 기만의 베일인 ‘마야’라고 불렀다. 이는 세계가 꿈과 같고, 나그네가 물이라고 착각하는 모래 위의 햇빛이나 뱀으로 오인하여 집어던진 새끼줄과 같다는 비유로 설명된다. 결국 우리가 인식하는 겉모습으로서의 객관 세계는 주관의 인식 작용과 형식에 의해 창조되고 조건 지어진 표상에 불과하다.
■ 물질의 본질: 인과성으로 엮인 시공간의 그물망
물질의 본질 전체는 곧 인과성이다. 물질의 존재란 물질이 다른 것에 작용하는 것을 의미하며, 작용하는 것으로만 시간과 공간을 채우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독일어에서는 물질적인 것의 총체를 지극히 적절하게 ‘현실성’이라 부른다. 물질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에 규칙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작용만이 물질의 본질이므로, 이 관계에 따르자면 물질은 전적으로 상대적인 성격을 띤다. 저자는 물질과 인과성의 본질적인 동일성을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시간과 공간은 각기 별개로 직관될 수 있지만, 물질은 이 두 가지 없이는 결코 상상할 수 없다. 단순한 시간 속에서는 어떠한 동시성이나 지속도 없고, 단순한 공간 속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없으므로 인과 관계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과율이 의미를 얻으려면 공간 속의 동일한 장소에 다른 상태가 이어지거나 특정 시간에 서로 다른 장소에 상이한 상태가 존재해야만 한다. 결국 인과 관계는 공간과 시간을 하나로 결합시킴으로써 성립하며,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결합이 곧 물질의 본질을 이룬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이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물질의 동시 존재와 지속이 가능해진다. 칸트가 물질은 공간 속에서 움직일 수 있다고 설명한 근거 역시 운동이란 공간과 시간이 결합해야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본 규정에서 출발하여 공간 충만성, 불가입성, 연장성, 무한한 분할 가능성, 가동성 등 물질의 선험적 특성들이 도출된다. 나아가 칸트는 저서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 71쪽에서 중력 또한 선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주장을 덧붙였다. 지성은 이처럼 결과에서 원인으로 넘어가며 작용 속에서 시공간을 결합하고, 형태는 변하더라도 언제나 불변하는 물질의 직관으로 세계를 빚어낸다.
■ 인간과 동물의 경계: 추상적 개념을 다루는 이성의 힘
직관적 표상과 추상적 표상의 차이는 인간과 동물을 나누는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 지구상에서 추상적 표상인 개념을 소유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뿐이며, 인간을 모든 동물과 구별시켜 주는 이 능력을 예로부터 이성이라 불러왔다. 동물은 전적으로 순간적인 인상과 직관적 동기의 영향만 받으며 현재 속에서만 살아간다. 반면 인간은 이성의 추상적 개념을 통해 현재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 속에서도 살며, 우연한 인상에 휘둘리지 않고 곰곰이 생각한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동물은 감각과 기분을 몸짓이나 소리로 알리는 데 그치지만, 인간은 추상적 사유의 도구인 언어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한다. 그리스어 ‘로고스’와 이탈리아어 ‘일 디스코르소’가 언어와 이성을 동시에 의미하듯, 이성은 언어의 도움을 받아 인간 사회의 문명과 학문을 구축했다. 저자는 추상적이고 논변적인 이성의 인식이 인간의 삶을 동물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러한 이성의 능력 덕분에 수천 명의 사람이 계획에 따라 함께 협력하고 이전의 경험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 본성의 이러한 고유한 특징은 여러 철학자에 의해 꾸준히 탐구되어 왔다. 1632년에 태어나 1704년에 사망한 로크는 저서 『인간지성론』 제2권 11장 10절과 11절에서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특성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이라고 명확히 제시했다. 뒤이어 1646년에 태어난 라이프니츠 역시 『인간지성신론』을 통해 로크의 이 같은 견해에 전적으로 동조했다. 이처럼 이성이란 개념 형성이라는 단 하나의 기능을 가질 뿐이며, 인간의 삶을 동물의 삶과 구별시켜 주는 모든 현상은 이 단순한 기능으로 명확하게 설명된다.
그러나 이성의 추상적 인식이 인간에게 긍정적인 결과만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동물의 직관적 표상에는 가상이 한순간 현실을 왜곡하는 정도의 문제만 발생하지만, 이성을 통한 추상적 표상에서는 오류가 수천 년 동안 인류를 지배하며 쇠로 된 멍에를 씌우기도 한다. 또한 실제적인 삶의 측면에서 이성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을 불러일으켜 동물이 겪지 않는 근심과 후회를 인간에게 안겨준다. 결국 이성은 인간을 지상의 주인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 추상적 개념과 사유 능력으로 인해 벗어날 수 없는 고통과 번뇌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 삶의 심연: 현상 너머에서 꿈틀대는 맹목적 의지

인간을 둘러싼 표상으로서의 세계 이면에는 인과율이나 시공간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맹목적이고 근원적인 충동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사물 자체인 ‘의지’다. 의지는 현상계의 사물들처럼 시간이나 공간 속에 분할되어 존재하지 않으며, 어떠한 궁극적인 목적이나 한계도 없이 끊임없이 노력하는 맹목적인 성질을 띤다. 예컨대 자연의 가장 단순한 현상인 중력은 연장이 없는 중심점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려 하며, 우주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진다 해도 강성에 맞서 중심을 향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저자는 현상 너머에서 만물을 움직이는 이 근원적 힘의 실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러한 맹목적 의지는 인식의 도움 없이 작용하는 동물의 본능이나 무기물의 움직임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알을 낳기 위해 둥지를 짓는 생후 1년 된 새나 먹이를 잡으려고 거미줄을 치는 어린 거미는 자신들의 목적에 대한 어떠한 표상이나 인식도 없이 맹목적인 의지로 행동한다. 하늘가재의 유충 역시 장차 생겨날 뿔에 대한 표상이 없으면서도, 암컷이 되는 경우보다 수컷이 되는 경우 뿔을 넣을 공간을 위해 나무에 두 배나 큰 구멍을 판다. 서기 354년에서 430년까지 생존한 성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신국론』 11권 28장에서 물체가 무게에 의해 가고자 하는 곳으로 쏠리는 것을 가리켜 무생물에도 일종의 노력이 존재한다고 통찰했다. 스피노자 또한 『서간집』 62에서 공중을 나는 돌에 의식이 있다면 그 자신의 의지로 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라며 무기물에 내재한 의지의 맹목적 충동을 지적했다.
그러나 하나인 의지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체화의 원리를 통해 무수한 개체로 객관화되면서, 의지는 자기 자신과 끔찍한 투쟁을 벌이는 내적 모순에 빠지게 된다. 모든 개체는 맹목적인 생존 욕동에 사로잡혀 자신의 의지를 긍정하는 반면, 타인의 의지를 부정하고 말살하려 들기 때문이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서식하는 불독 개미를 두 쪽으로 갈라놓으면 머리 부분은 꼬리를 물고 꼬리 부분은 머리를 찌르며, 둘이 죽거나 다른 개미에게 끌려갈 때까지 반 시간이나 자신과 싸움을 계속한다. 미주리 강가에서는 크고 거친 포도 덩굴이 거대한 떡갈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휘감아 질식시켜 버리는 현상도 흔히 발견된다. 이처럼 형태를 유지하려는 불변의 물질을 놓고 벌어지는 무수한 개체들의 영원한 쟁탈전은 삶에의 의지가 지닌 참혹한 자기 분열을 보여준다.
■ 시사점: 환상을 걷어내고 삶의 핵심을 직시하는 법
쇼펜하우어의 통찰은 성공 강박과 SNS의 허상에 매몰된 현대인들에게 서늘한 해방감을 선사한다. 그는 “삶은 짧고 진리는 길다”고 말하며, 유행과 타협하지 않는 고독한 사유만이 영원한 가치에 도달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했다. 우리가 실재라고 믿으며 집착하는 부와 명예, 타인의 평판은 모두 마야의 베일에 가려진 꿈과 같은 것이다.
세계가 나의 표상이라는 인식은 고통의 대상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관조자의 자리를 마련해 준다. 삶의 모든 투쟁이 내 안의 맹목적인 의지에서 비롯됨을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의지의 노예가 아닌 관조자로서 내면의 평온을 얻을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염세주의가 아니다. 세상의 환상을 명확히 직시함으로써 헛된 희망에 휘둘리지 않는 ‘가장 강력한 긍정’에 도달하는 길이다.
이 책은 근본적인 삶의 의문에 부딪혀 절망해 본 자, 지적 허영이 아닌 실존적 성장을 갈구하는 자들에게 권한다. 쇼펜하우어의 문장들은 안일한 낙관주의를 도려내고 단단한 철학적 뼈대를 세워줄 것이다. 저녁이 되어 목적지에 이른 페트라르카의 기쁨처럼, 이 고전을 통과한 독자 또한 세계의 환상 너머에 있는 단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는 경이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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