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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요약] 놀이하는 인간 - 놀지 못해 아픈 이들을 위한 인문학 — 안락한 노예의 삶을 거부하고 유희적 혁명을 선택하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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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락함이라는 대가로 쾌락을 추구당한 문명의 역설

현대 문명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와 안락함을 선사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현대인은 그 어느 때보다 깊은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문화에서의 불안》을 통해 통찰했듯이, 문명화 과정은 인간의 본능적 충동을 억압함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유지한다. 이러한 억압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자극의 빈곤 현상이다. 현대인은 높은 생활수준을 얻은 대가로 삶의 생동감 넘치는 쾌락을 상실했다.
우리가 누리는 복지사회의 안락함은 사실상 즐거움을 추방한 대가로 얻은 전리품과 같다. 정치는 우리에게 무엇이 좋은지를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다고 믿으며, 청교도적 자세로 개인의 삶을 규제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인간은 자발적 동기를 잃고 무미건조한 일상에 매몰된다. 이제 놀이는 단순한 소일거리를 넘어, 억압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문명의 구조적 모순에 저항하는 혁명적 수단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고대인류학자 루돌프 빌츠가 지적했듯이, 현대인은 자극의 결핍으로 인해 불행하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충동의 자유나 복지가 아니라 바로 내적 동기부여다. 탈마법화된 세계에서 무미건조함을 견디게 해주는 유일한 보상은 바로 놀이다. 안락함에 매몰되어 감각이 마비된 노예의 삶을 거부하고, 스스로 규칙을 설정하며 몰입하는 유희적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이야말로 현대 문명의 병리학적 징후를 치료할 유일한 해법이다.

■ 21세기 새로운 인간상의 등장: 호모 에코노미쿠스에서 호모 루덴스로

심리학자 카를 뮐러는 1918년에 유아의 정신 발달에 관한 저서를 출간하며 ‘즐기기, 놀이하기, 만들기’라는 구분을 제시했다. 저자는 이 구분법을 토대로 19세기는 생산자의 시대, 20세기는 소비자의 시대, 그리고 21세기는 놀이하는 사람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테제를 발전시킨다. 과거 경제학자들이 생산자를 분석하고 트렌드 연구자들이 소비자를 규명했다면, 이제는 놀이하는 사람을 이해해야 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실제로 오늘날 놀이는 창의적 잠재력으로서 현실에 침투해 있으며, 현대 세계는 오락거리를 통해 지탱되고 있다.
이 새로운 시대의 인간상은 기존의 학술적 인간 모델인 호모 에코노미쿠스나 호모 소시올로지쿠스와 뚜렷하게 대조된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비용과 효과를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시장 참여자이며, 호모 소시올로지쿠스는 타인의 기대와 사회적 통제망에 얽매여 살아가는 배우와 같다. 하지만 인간이 누리는 진정한 삶의 즐거움은 이처럼 수동적이고 계산적인 모델만으로는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저자는 이 두 가지 인간상에 대항하여 놀이하는 인간인 호모 루덴스가 지닌 고유한 역할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천명한다.

놀이하는 인간은 경제적 효용성보다 순수한 몰입과 자극의 즐거움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합리적 계산에 따라 일하고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받는 방식은 전형적인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삶의 문법이다. 반면 호모 루덴스는 시장의 규정이나 노동윤리에 얽매이지 않으며, 자발적인 취미 활동을 통해 이 경제적 이성에 강력하게 저항한다. 이들은 노동을 통한 정해진 수입보다는 마치 도박에서 판돈을 걸고 대박을 터뜨릴 때처럼 우연이 주는 놀라움의 가능성을 기꺼이 추구한다.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외쳤던 경제 우선주의 슬로건은 이 유희적 세계에서 정반대의 진실로 새롭게 정의된다.
노동을 소외시키는 진짜 원인은 자본주의적 착취가 아니라 자극의 결핍이며, 일을 자유 시간과 대립시키는 태도다. 하지만 일에 대한 유희적 태도를 수긍하는 데 성공한다면 고된 직무조차 스도쿠 퍼즐을 푸는 것처럼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다. 이처럼 즐거움을 주는 놀이와 같은 노동은 직업을 단순한 수단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소명으로 변화시키는 촉매가 된다. 결국 자신의 일을 진지한 놀이로 전환하여 즐기는 워커홀릭 역시 삶의 쾌락을 능동적으로 획득하는 호모 루덴스의 또 다른 형태다.
■ 국가 개입주의와 청교도적 안락주의에 대한 유희적 저항

현대 복지사회는 생활의 안락함을 얻은 대가로 삶의 순수한 쾌락을 완전히 추방하는 안락주의 증후군에 신음하고 있다.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는 이를 ‘안락주의’라 지칭했고, 티보르 스키토프스키는 저서 《기쁨 없는 경제》를 통해 높은 생활수준이 도리어 좌절감을 낳는 딜레마를 규명했다. 여기에 시민들의 개인적 삶을 일일이 규제하려는 정치가들의 청교도적 쾌락적대주의가 가세하면서 일상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위축되었다. 지은이는 국가가 개인의 행복까지 처방하려는 후견주의적 통제에 맞서는 수단으로 놀이가 지닌 전복적 가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정치권은 중독 예방과 시민 보호를 명분 삼아 리처드 탈러와 캐스 선스타인의 《넛지》 이론 같은 세련된 개입주의로 개인의 선택을 통제하려 든다. 원래 법학자였던 선스타인은 오바마 행정부에서 공직을 맡아 이러한 가부장적 사회 설계 방식을 정책에 실제로 도입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국가는 채식 식단을 강요하고 음주나 흡연, 오락을 중독이자 죄악으로 몰아가며 국민을 나약한 존재로 취급한다. 그러나 1792년 빌헬름 폰 훔볼트는 저서 《국가의 작용에 한계를 설정하고자 하는 시도에 관한 소견》을 통해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국가 권력의 도덕적 한계를 일찌감치 경고한 바 있다.
불안을 무기로 삼는 국가의 개입주의는 리스크를 터부시하는 마술적 태도로 퇴행하는 경향을 보인다. 일례로 독일 메르켈 정부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드라마틱한 ‘에너지 전환’ 정책을 추진하며 위험 원천을 차단하려는 강력한 예방 수칙을 가동했다. 정치가들은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빼앗아 즐거운 로봇이나 행복한 노예로 만들려 하지만, 대중은 통제된 위험을 즐기는 유희적 충동을 통해 끊임없이 탈출구를 모색한다. 2014년 7월 한 주말 동안 독일에서 250명 이상이 익사했음에도 강과 호수 이용을 전면 금지하지 않는 것처럼, 사행성 게임 역시 통제 불가능한 위험이 아닌 개인이 스스로 선택하고 즐기는 기호의 문제로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실제로 도덕적 엄숙주의자들이 경고하는 게임 중독의 위험성은 국가의 세금 영수와 이권 보호를 위해 다소 과장된 측면이 존재한다. 독일 중독 문제 센터에 따르면 독일 성인의 약 0.5퍼센트만이 병리적 수준의 게임을 하며, 이 수치는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2014년 4월 2일 오스트리아 일간지 《쿠리어》가 8만 유로를 탕진한 여성을 조명한 것처럼 미디어는 극단적 사례로 불안을 조장하지만, 정작 국가는 이면에서 사행성 기계를 독점하며 막대한 세금을 거두고 있다. 결국 무미건조한 복지국가의 촘촘한 규제 규범 속에서 규칙에 따라 자발적으로 작동하는 놀이는 청교도적 규제에 저항하는 가장 강력한 자유의 도구가 된다.
■ 기능쾌락과 인위적 규칙이 선사하는 확실성의 섬

심리학자 카를 뮐러는 놀이가 제공하는 쾌락의 핵심을 ‘기능쾌락’이라 명명했다. 이는 특정한 결과를 목적으로 삼지 않고, 행동 자체와 그것이 유발하는 작용 자체에서 얻는 자기보상적 즐거움이다. 저자는 비행기 안에서 아내가 실용서를 읽는 동안 자신은 심심풀이로 스도쿠 문제를 풀었던 일화를 소개한다. 그는 스도쿠를 뇌 훈련을 위해서가 아니라 숫자로 된 수수께끼를 풀며 얻는 성공적인 행위의 즐거움과 과정 자체의 만족감을 위해 즐겼다.
이러한 기능쾌락은 일상의 여러 의무와 구분되는 인위적 규칙 속에서 보장된다. 버나드 슈츠의 정의처럼 놀이란 불필요한 장애물을 자유의지로 극복하고 스스로 만들어 낸 불확실성을 통제하려는 자발적 노력이다. 가령 축구에서 손을 사용하면 골을 넣기 쉽지만 규칙이 이를 금지하며, 팬들은 오프사이드 규칙을 변경하려는 제안에 거부 반응을 보인다. 이처럼 규칙의 신성함은 참여자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려주는 명료한 질서를 부여한다.
인위적인 규칙을 준수할 때 인간은 오히려 더 큰 창의력과 해방감을 경험하게 된다. 한스 프라이어는 체스 경기를 예로 들어 자유로운 움직임을 인위적으로 제한한 공간에서야 비로소 창의적인 플레이가 가능해진다고 설명했다. 만약 더 많은 자유가 주어져 제약이 사라진다면 오히려 게임의 수준은 낮아지게 된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 역시 엄격한 규칙에 복종함으로써 규제와 강제를 동반하는 일상의 법으로부터 해방된다고 분석했다.
현실의 진짜 불확실성은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가 2007년 저서 《블랙 스완》에서 경고한 것처럼 예측 불가능하고 무지한 영역이다. 이미 17세기 중반 블레즈 파스칼은 저서 《팡세》 233항에서 도박의 리스크를 계산 가능한 확률론으로 규정했으며, 2013년 9월 9일 한 베를린 시민이 16유로 25센트를 걸고 1,350만 유로의 잭팟을 터뜨린 실제 사례도 이러한 규정 속에서 가능했다. 저자는 현실의 혼란스러운 불확실성을 자극제로 변환하며 우리에게 완벽한 안정감을 선사하는 놀이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비유한다.

이처럼 확실하게 구획된 놀이의 마법진 안에서 인위적 규칙에 절대적으로 충성할 때 인간은 비로소 일상의 무력감에서 온전히 해방된다.
■ 우연과 리스크가 만드는 감정의 누에고치와 몰입의 미학

현대 문명화 과정은 인간의 강렬한 감정과 헌신, 아드레날린 분비를 동반하는 공격적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억압한다. 이러한 통제 속에서 놀이는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 지나친 열정을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일종의 망명지 역할을 수행한다. 문화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이와 같은 보호 공간을 경기장이나 신전처럼 일상 세계와 단절된 마법진의 영역으로 설명했다. 트렌드 연구자 페이스 팝콘은 외부 세계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는 놀이의 차단된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누에고치를 짓는 현상에 비유했다. 저자는 놀이가 지닌 이러한 감정적 보관함으로서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놀이라는 누에고치 내부에서는 일상의 무거운 규범이나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해방감을 향유한다. 이는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이 지적한 청소년기의 사회심리학적 지급유예 상태처럼, 아무런 보복이나 책임 없이 다양한 행동을 시험하도록 돕는다. 고대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신들이 인간 세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최고의 기쁨을 누리는 고립된 영토를 중간 세계라고 칭했다. 낭만파 시인 빌헬름 하인리히 바켄로더가 현실에서 분실한 감정들을 시에 담는다고 묘사했듯이, 현대인은 토요일마다 경기장을 찾거나 카지노 기계 앞에서 억압된 감정을 발산한다.
현대 복지사회는 고도의 안락함을 획득한 대가로 일상의 생생한 쾌락을 상실하는 역설적 불만족에 시달린다.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는 이를 안락주의 증후군이라 불렀고, 티보르 스키토프스키는 저서 《기쁨 없는 경제》를 통해 높은 생활수준이 도리어 고통스러운 좌절감을 낳는 현상을 고발했다. 이 무미건조한 편안함이 제공하는 지루함에 대항하기 위해, 뇌신경학적 자극을 주는 놀이와 스포츠의 인위적 흥분이 요구된다. 고대인류학자 루돌프 빌츠는 문명화에 의해 세계가 지루해지는 현상을 혼란 결핍에 의한 피해로 파악하며, 리스크가 동반된 유희적 행동이 각광받는 원인을 증명했다.
안전이 보장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도리어 자극을 얻기 위해 스스로 통제된 위험 속에 자신을 내던진다. 미술사학자 후베르트 부르다가 가정주부의 번지점프라고 명명했던 주식 초단타매매나 아우토반에서 시속 220킬로미터로 질주하는 일탈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200년 전 제러미 벤담이 분류한 심층 놀이의 특징을 띠며, 예측 불가능한 우연을 강력한 자극제로 성공적으로 전환시킨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주창한 몰입은 너무 쉬운 과제에서 오는 지루함과 너무 어려운 문제에서 오는 두려움 사이의 좁은 틈새를 흐르는 심리적 유체역학이다.
■ 시사점: 양심의 가책을 버리고 유희적 본성을 회복하라

노르베르트 볼츠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놀지 않는 사람은 병든 사람이다.” 생산성과 효율성이라는 청교도적 강박에 사로잡힌 현대 사회에서 놀이는 흔히 시간 낭비나 죄악으로 치부되어 왔다. 그러나 진실은 그 반대다. 문화와 창조성, 그리고 삶의 질을 결정하는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놀이하는 사람들 덕분에 존재할 수 있었다. 놀이는 결핍된 기능을 보완하는 대체의학적 처방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우리는 이제 놀이에 대해 느끼는 근거 없는 양심의 가책을 던져버려야 한다. 합리적 경제인의 가면을 벗고, 스스로를 위험과 우연 속에 내던지는 유희적 본성을 회복해야 한다. 앨버트 허시먼이 지적했듯, 자본주의는 열정을 이해관계로 치환하며 인간을 일차원적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놀이는 이 감정의 공백 상태를 채우는 유일한 파라다이스다. 놀이는 노동의 피로를 풀기 위한 휴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놀이는 인간을 자유롭게 만든다. 규칙에 얽매임으로써 오히려 자유로워지는 역설, 우연에 몸을 맡김으로써 운명의 주인이 되는 황홀경은 오직 놀이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문명이 설계한 안락한 노예의 삶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불확실하지만 생동감 넘치는 유희적 혁명을 선택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노르베르트 볼츠의 조언처럼, 놀고 싶다면 놀아라, 그 어떤 가책도 느끼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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